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.
상금은 그때 돈으로 30만원인가.국민학교(현 초등학교) 때는 통영과 부산.
예전에는 신춘문예와 별도로 학생논문이란 부문이 있었다.단지 철도 건설의 지지부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위를 달리는 열차의 편수나 질에서도 인구 비례를 훨씬 넘는 차별을 보인다.학창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.
다과회에서 오가는 대화는 실망스러웠다.지금 같으면 작가도 생활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.
그때부터 나는 나라가 바로 되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.
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하위 계급의 해양경찰이었다.그들은 교내에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.
웬만한 공무원 월급의 열 배 정도였다.전남 광주(현 광주광역시)를 거쳐 여수로 갔다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.
부산고 2학년까지는 나름대로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했다.그 사람은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.